페르난도 파테르노스테르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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페르난도 파테르노스테르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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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름
페르난도 파테르노스테르
(Fernando Paternoster)
생년월일
사망년월일
국적
출신지
페와호
포지션
레프트 풀백
신체조건
179cm / 70kg
등번호
소속팀
CA 아틀란타 (1921-1926)
라싱 클루브 데 아베야네다 (1927-1932)
CA 벨레스 사르스필드(임대) (1930-1931)
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(1936)
국가대표
16경기 / 0골(1928-1930)
감독
데포르티보 무니시팔 (1937)
콜롬비아 (1938)
아틀레티코 나시오날 (1948-1951)
아틀레티코 나시오날 (1954-1956)
CS 에멜레크 (1962-1966)
목차
1. 개요2. 생애
2.1. 선수 생활2.2. 은퇴 이후
3. 플레이 스타일 & 평가4. 뒷이야기5. 수상
5.1. 국가대표5.2. 감독

1. 개요 [편집]

El Marqués[2]

아르헨티나축구선수 출신 감독. 1962년부터 1966년까지 CS 에멜레크 감독을 맡았다.

2. 생애 [편집]

2.1. 선수 생활 [편집]

2.1.1. 클럽 [편집]

파테르노스테르는 1919년부터 아틀란타 클럽에서 뛰기 시작하였고, 1921년에 1군 무대에 데뷔하였다. 1927 시즌부터는 라싱 클루브에서 활약하였다. 그 중 1930년과 1931년에는 벨레스 사르스필드 팀에서 칠레미국에 투어를 돌기 위해 파테르노스테르의 임대를 요청하였다. 그리고 라싱 클루브에서 이를 받아들였다.

파테르노스테르는 1년 뒤 라싱 클루브를 떠났고 그대로 은퇴하는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1936년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에서 1경기를 더 뛰고 은퇴하였다.

2.1.2. 국가대표 [편집]

파테르노스테르는 1928년 올림픽에서 데뷔하였다. 결승전까지 모든 경기에 출전하면서 조국의 은메달 획득에 큰 기여를 하였다. 여기에서 큰 활약을 한 파테르노스테르는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초대 월드컵에서도 좋은 활약을 보였다. 그리고 월드컵에서는 라싱 클루브의 동료였던 호세 데야 토레와 주전으로 활약했다. 하지만 득점은 기록하지 못했다.

2.2. 은퇴 이후 [편집]

파테르노스테르는 콜롬비아에콰도르 등지에서 감독으로 큰 명성을 날렸다. 1937년 콜롬비아에 건너간 그는 새로 창립된 클럽 데포르티보 무니시팔[3]의 초대 감독이 되었다. 그리고 콜롬비아 대표팀의 감독을 맡기도 했다.

이후에는 콜롬비아의 아틀레티코 나시오날과 에콰도르의 에멜렉에서 감독으로 활동하며 팀을 각 리그의 강팀으로 만들었다.

3. 플레이 스타일 & 평가 [편집]

선수로서는 다소 전성기가 짧았다. 하지만 콜롬비아와 에콰도르 축구계에서는 대부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.

4. 뒷이야기 [편집]

  • 파테르노스테르는 월드컵에서 득점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.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페널티 키커로 나섰지만 그의 페널티 킥은 멕시코의 골키퍼 본피글리오에게 막히고 말았다.
  • 아들인 펠릭스도 1960년대 아틀란타에서 축구선수로 활약하였다. 하지만 아버지만큼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.

5. 수상 [편집]

5.1. 국가대표 [편집]

5.2. 감독 [편집]

[1]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.[2] 귀족 집안 출신인 배경이 있다.[3] 이 클럽은 CD 미요나리오스의 전신이다. 1940년대에 아돌포 페데르네라,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등 아르헨티나의 스타 선수들을 쓸어 모은 그 팀 맞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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